오늘의 (3/3) 말씀 묵상 (사도행전 11장9절, Acts 11: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The voice spoke from heaven a second time,
‘Do not call anything impure that God has made clean.’
 
베드로는 자신도 처음에 율법적 태도에 얽매여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셨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사람이
부정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가이사랴의 고넬료와 그 식구들을 정결케 하셨으므로 베드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식탁을 같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성령이 그들에게도 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한 자들은 그들이 과거에 우상 숭배자였던, 흉악한 범죄자였든 관계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현재의 상태를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곳인데 외모가 화려한 자들을 존대하고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또한 과거나 편견으로
판단하는 것 또한 성경의 교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되게 하는 것은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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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 말씀 묵상 (사도행전 7장33절, Acts 7: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Then the Lord said to him,
‘Take off your sandals, the place where you standing is holy ground.’
 
이 구절은 시내산 자체가 거룩한 땅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시내산 광야에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곳을 거룩한 땅이라고 지칭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곳이면 어디든 그 장소는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근동 지방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샌들 곧 일종의 슬리퍼 모양의 신을 싣고 다녔는데, 그것은
그 지역이 고온 건조하며 먼지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지방 사람들의 신과 발은
먼지로 덮여 있었고, 그로 인해 그들은 생각하기를 신은 더럽다고 여겼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발에서
신을 벗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가증하고 추한 옷까지도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의 빚진 자로 날마다 그분이 뜻하시는 바를 따르며 그분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삶이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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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 말씀 묵상 (사도행전 2장37절, Acts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When the people heard this, they were cut to the heart
and said to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Brothers, what shall we do?’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이 구절처럼 탄식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범인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베드로의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듣고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이성적인 죄책참을 강하게 느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제자들 속에 역사하신 성령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그들의 죄를 책망하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무리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경청하고 나서 저희의 유일한 소망이며 오랫동안 고대하던
그 메시야를 그들 스스로 배척하며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음을 깨닫자 모서리치도록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제 성령의 지시를 기다리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때때로 동료의 과실에 의해서 자신에게 그 피해가 미친다 하더라도
불평하거나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아량이 필요합니다.  그것 역시 성령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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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 말씀 묵상 (스바냐 1:12절, Zephaniah 1:12)

그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At that time I will search Jerusalem with lamps and punish
those who are complacent, who are like wine left on its dregs,
who think, ‘The LORD will do nothing, either good or bad.’
 
하나님의 심판은 자신을 모독하고 무시하는 자들, 그리고 무사 안일한 자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여기 ‘찌꺼기 같이 가라앉다’라는 표현은 태만하고 무사 안일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한 자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특히 지도자들, 강포와 궤휼을 행한 자들, 여호와께서 복이나 화를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처벌을 받아 멸망 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분의 존재마저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예루살렘이 외적의 침략을 받아 그곳 주민들의 생활이 파괴될 것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에 빠진 삶을 살아간다면,
그들의 수고와 노력이 아무 소용없을 것이며, 결국은 자신들의 죄값으로 인해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믿음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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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2/28) 말씀 묵상 (사도행전 2장33절, Acts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Exalted to the right hand of God,
he has received from the Father the promised Holy Spirit
and has poured our what you now see and hear.
 
여기서 ‘오른손으로’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의 권능을 상징하는 말이지 승천한 예수님의
위치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아닙니다.  한편 ‘높이시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영광스러움을 내표하는 말입니다.  신학 용어로 예수님의 
‘승귀’라고 합니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란 표현은 성경의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나와서 성자를 통해 오십니다.  바로 이 구절에 의하여,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종교회의의 결정이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순종하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당신의 우편에서
모든 영광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고난과 희생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희생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마침내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 그 영광을 바라보며 이겨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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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27) 주일입니다.

오늘은 2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정확하고 부정적인 것만 볼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위를 보며 새로운 것을 기대하며
성삼위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의 예배를 드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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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2/26) 말씀 묵상 (사도행전 2장21절, Acts 2:21)

누그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And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마지막 날에는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될까요?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여기 ‘부르다’에 사용된 원어는
막연히 주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와 더불어 기도하는 가운데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즉 ‘부른다’는 표현은 오히려 ‘믿는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마지막 날
심판의 위기 속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이루시는 모든 일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확신하는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구원이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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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2/25) 말씀 묵상 (호세아 11장8절, Hosea 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How can I give you up, Ephraim?
How can I hand you over, Israel?
How can I treat you like Admah? How can I make you like Zeboiim?
My heart is changed within me; all my compassion is aroused.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사랑을 이 구절에서처럼
표현하고 계십니다.  여기 ‘아드마’와 ‘스보임’은 모두 사해 내륙에 위치한 도시로서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유황과 불로 멸망된 도시들입니다. (신 29:23)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아드마와 스보임처럼 철저히 파멸을 당하여 아무 것도 그 땅에서
수확할 수 없도록 버림을 받는 것이 마땅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스라엘을 
다루신다 해도 아무런 잘못이 없으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전멸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긍휼이
온전히 불붙는 듯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한 번 택한 백성에 대해 노하시기를 더디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전멸당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도는 그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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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2/24) 말씀 묵상 (호세아 6장6절, Hosea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For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and acknowledgment of God rather than burnt offerings.
 
여기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뿐만 아니라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까지도 포함합니다.  만약 사랑과 진실 없이 위선적이고 공허한
제사와 번제를 드린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신 목적은 제사의 태만함만을 책망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공의와 자비와 당신에 대한 지식이 없음을 각성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형식적인 제사보다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며 인애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외형적인 예식을 통하여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심을
깨닫고 경건의 모양이나 의식보다도 진정한 경건의 능력이 생활 중에 필요함을 명심하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교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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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2/23) 말씀 묵상 (호세아 6장4절, Hosea 6: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What can I do with you, Ephraim?
What can I do with you, Judah?
Your love is like the morning mist, like the early dew that disappears.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와 같은 여호와의 질문은 매우 부정적인 질문입니다.
에브라임과 유다를 회개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은 모두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포자기나 절망을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호와의 관심은
백성들에게 집중되고 있으나 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대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애’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데서 오는 충성이며, 이웃을 온유하게 대하는 자비입니다.
이스라엘의 인애는 아침 구름과 이슬 같아서 쉽게 사라지고 맙니다.  이는 그들의 신앙이
매우 변덕스럽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 인애, 회개, 감사, 사랑이 수반되지 않은 형식적인 예배나 기도를
하나님께서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책망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함으로,
우리의 선행과 충성이 피상적이고 일시적이지 않고, 성실함과 지속성이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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