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3/3) 말씀 묵상 (창세기 7장1절, Genesis 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The Lord then said to Noah, Go into the ark, you and your whole family,
because I have found you righteous in this generation.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기에 앞서 노아와 노아의 가족을 보살피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노아의 경건함에 대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결코 외적인 것만 보는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보시는 하나님의 평가이니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아가 죄가 없는 완전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의미는 노아가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한 번도 짓지 않는 온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하나님꼐서 노력하는 것을 인정하시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Justification)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그렇게 불러주시는가? 바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의 죄를 대신 사해주신 구세주로, 그리고 삶의 주인으로 믿고 모시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국경, 피부 색깔에 관계가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집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칭의의 다음 단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죄가 없이 살려고 애쓰는 삶으로 ‘성화’ (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이후의 모든 사람은 바로 이 단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을 마치고, 육신의 장막을 벗는 순간에는 말 그대로 죄가 없는 ‘영화’ (Glorification)의 단계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서 영원히 함께 지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못할 죄가 있으며, 그런 죄인이 있겠습니까?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진정으로 믿으면 그 모든 죄가 다 용서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죄인이 아니라 용서받는 죄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을 거듭남, 중생, born again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이 똑 같은 죄에 거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죄에서 떠난,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믿는 삶이 아닙니다. 믿은 후에도 계속해서 전과 같이 죄 가운데 거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계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의로우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에 갈 수 있겠습니까? 노아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의로움을 지키고 험난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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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 말씀 묵상 (고린도후서 3장17절, 2 Corinthians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in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예언을 다 이루시고 이 땅에 구원의 길을 열으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고 믿고 예수님을 메시아 즉 그들이 기다렸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선한 윫법을 지키며 거룩하거 경건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중ㅇ합니다. 문제는 그 선한 율법을 사람이 다 지킬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죄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책감만 더 커지게 됩니다. 만약 율법을 지키고 구원을 얻는데 문제가 없다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그런 유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모세가 그 얼굴의 광채를 가리우려고 얼굴를 수건으로 가림으로 그 영과으이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한 것과 같습니다.
복음을 향유하고 누리는 자들의 특권은 율법 가운데 사는 자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습니다. 율법 가운데 사는 자들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율법을 의무적으로 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유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 분께로 돌아가면 얼굴에 덮혀있던 수건이 벗겨질 때가 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자유함으로 인해 복음을 믿는 자들은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보다 훨씬 더 복 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신 것은 그 당시 모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영’으로서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얼굴에 쓰고 있던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님을 보는 것처럼 명확하게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은총이 영원한 주의 영 가운데 완성되어질 때까지 이 자유함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자유함을 누리며, 주님을 더 닮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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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 말씀 묵상 (신명기 9장26절, Deuteronomy 9:26)
여호와께 간구하여 이르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량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I prayed to the Lord and said, O Sovereign Lord, do not destroy your people,
your own inheritance that you redeemed by your great power and brought out of Egypt with a mighty hand.
신명기는 모세의 고별설교입니다. 한 번의 실수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바로 눈앞에 보면서도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기에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고 하는 광야 세대를 향해 마지막으로 권며하는 말씀입니다. 광야 40년을 돌아보니 얼마나 마음에 북받쳐 오르는 것이 많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새롭게 결단하여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 때마다 언제나 하나님께 엎드려 긍휼을 호소하며 긷했습니다. 심지어 백성이 자신을 대적하고 원망할 때도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도 그 배후에 모세의 수많은 눈물의 금식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모세가 처한 상황과 유사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풍조를 따라가며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하나님을 반역하며 우상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때에 우리도 모세와 같이 깨어 금식하며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세계 열방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눈물의 기도자를 찾고 계십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닙니까? 모세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다해 중보기도를 드렸는데 나는 얼마나 중보기도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오늘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 중보기도를 올려드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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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2/28) 말씀 묵상 (야고보서 1장25절, James 1:25)
자유롭게 하는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But the man who looks intently inot the perfect law that gives freedom, and continuues to do this,
not forgetting what he has heard, but doing it; he will be blessed what he does.
야고보서는 신약의 잠언이라고 불리는 아주 구체적인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온전한 율법’은 ‘자유’를 그 속성으로 합니다. ‘속박’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율법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경건한 자는 이 자유를 주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시편 1편에는 바로 이렇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를 복있는 즉 행복한 사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왜 그런가? 여호와께서 주신 진리 곧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유의 율법이 속박의 율법이 된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지키는 최선의 길은 그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실천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는 있지만 행하지 않습니다. 하기 싫어서 일 수 있고, 힘들어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만약 이렇게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거울을 보고 돌아서서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거울을 보는 이유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잘못된 것이 없는지 보고 고치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울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을 보는 이유도 바로 그 진리의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고 돌이키기 위함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변화된, 거듭난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보고 듣고 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이 험한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며, 그런 사람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지금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마지막은 결국 순종이라고 봅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을 듣고 행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행함으로 신령한 복을 누리는 믿음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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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2/27) 말씀 묵상 (에스겔 22장30-31절, Ezekiel 22:30-31)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I looked for a man among them who would build up the wall and stand before me in the gap
on the land so I would not have to destroy it, but I found none. So I will pour out my wrath on them
and consume them with my fiery anger, bringing down on their own heads all they have done,
declares the Sovereign Lord.
에스겔 선지자는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되어 포로로 잡혀 간 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잡혀 간 유다 백성 중에 자신의 백성을 위해 간구하는 의인이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는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구했듯이 유다를 위해 간구하는 의인이 있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단 한 명의 그런 의인을 찾으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만약 단 한 명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의인이 있었더라면 상황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죄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두르고 있는 성벽에 작은 틈새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곳으로 선한 일들은 흘러나가며 대산 악한 일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 틈새를 막아서는 방법은 바로 회개와 기도와 돌이킴입니다. 거대한 댐에 작은 구멍이 결국 댐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작은 죄가 결국은 점점 자라서 보호를 막고 나라를 무너지게 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그 외에 많은 리더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거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을 때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가 엎드려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진노를 돌이키셨거나 진노를 크게 줄이셨습니다.
리더를 욕하는 것은 쉽습니다. 나라를 욕하는 것도 쉽습니다. 그러나 그 리더를 위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금 조국과 미국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나라가 거의 둘로 나누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거짓의 아비요, 살인지요, 분열케 하는 마귀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믿음의 사람들이 썩어져 부패햐여 악취가 나는 세상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선포했듯이 우리의 전쟁은 혈과 육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공중 권세를 쥐고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그 배후에는 악한 사탄/마귀가 있기에 기도가 절실할 때입니다. 오늘도 성 무너지 곳을 막아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중보기도를 올려드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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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2/26) 말씀 묵상 (요한복음 14장26절, John 14:26)
보혜사 성령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said to you.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떠나 안 계실 상황이 두려웠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보혜사,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거동락하셨던 것처럼 제자들의 마음에 거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그들을 떠나실 수가 없습니다. 그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제자들 마음에 거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게 하시며, 그들의 마음이 강해지도록 권면하십니다. 사탄의 유혹이나 제자들 자신의 연약한 소리를 물리칠 수 있도록 약속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또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도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 역시 우리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주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기에 어떤 것이든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나가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에 모든 연약함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들입니까! 너무도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까! 두려움을 물리치는 평안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안이요, 우리의 삶을 바꾸시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주어지는 성령님으로 인해 늘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 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얻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성령을 가지고 있는 것과 성령충만은 다릅니다. 그것은 촛불과 뜨거운 용광로로 비교가 될 수 있습니다.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구해야 합니다. 오늘도 성령의 충만을 구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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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2/25) 말씀 묵상 (시편 42편5절, Psalms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케 하는가?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Why are you downcast, O my soul?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시편 저자의 슬픔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이 마땅한 한계를 넘어서도 안 되고, 그의 영혼이 낙망하도록 심해져서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깊은 절망에 빠져 낙망하여 있을 때, 자신의 마음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네가 당황과 혼란 속에서 불안해하는데 어찌하여 그러느냐?’
많은 경우에 우리의 불안은 그 근거와 이유를 자세히 조사하게 되면 사라져 버리곤 합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영혼의 의기소침과 불안을 치료하는 뛰어난 해독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망하거나 낙심할 때는 하나님을 바라도록 우리 자신에게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영적인 침체에서 해어나와 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였을 때라도 스스로이 연민과 탄식에 빠지기 보다는 하나님꼐 소망을 두고 영혼의 몸삼을 앓아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그 낙심이, 그 충격이 너무 커서 하나님을 바라 볼 힘조차 없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 놀라 하나님을 생각지도 못할 떄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쉽지 않지만 정신을 차리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것도 훈련입니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우리가 평소에 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체질화 되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총을 인하여 얻는 도움과 평안으로 그 분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맡기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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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2/24) 말씀 묵상 (마태복음 6장6절, Matthew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But when you pray, go into your room, close the door and pray to your Father.
Then your Father, who sees what is done in secret, will reward you.
오늘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기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인간의 습관은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 안에서도 나타나는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를 주목할 때도 있고, 무관심 할 때도 있습니다. 실제로 관심이 없을 때가 더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분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께는 어떤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전지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필요와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 분의 임재하심과 들으심을 믿고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집중하여 기도하기만 하면, 은밀한 중에 보고 계시는 그 분께서 들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 분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이고 싶은 동기가 있다면 어디서나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더라도, 진정으로 주님을 향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당시 종교 지도자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라면 분명히 그것은 외식 즉 위선이요 자기 상을 이미 받았기에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는 사람들이 기도를 응답합니까?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은밀하게 모든 것을 보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방해받지 않는 장소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구할 때 응답이 됩니다. 그런 장소가 있습니까? 그것이 사무실이든, 교회든, 침상 옆이든, 거실이든, 어떤 곳이든 방해받지 않으면 됩니다. 오늘도 그런 장소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는 복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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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2/23) 말씀 묵상 (다니엘 9장18절, Daniel 9: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조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Give ear, O God and hear; open your eyes and see the desolation of the city that bears Your name.
We are not make requests of you because we are righteous,
but because of your great mercy.
다니엘이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과 형편을 돌아봐 달라고 간구하는 이 기도는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울거나 보채는 모습과 같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기도의 근거가 백성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긍휼에 근거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지만 동시에 긍휼과 은혜와 자비로우신 하나님으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므로, 그분을 믿음으로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심에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완전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심판에서 회복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민족의 회복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근거하여 기도할 때 가능할 줄 믿습니다.
오늘 나라를 위한 기도를 올려드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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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2/22) 말씀 묵상 (디도서 3장9절, Titus 3:9)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But avoid foolish controversies and genealogies and arguments and quarrels about the law
because these are unprofitable and useless.
예나 지금이나 신앙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 ‘어리석은 변론’들로 인해 공동체가 시끄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어리석은 변론’이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것이나, 쉽게 대답할 수도 없고
또 설사 대답할 수 있다고 해고 성도들의 생활에 실제적 도움이나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논쟁들을 가리킵니다.
초대교회에는 하나님의 본질, 천사들, 여호와라는 이음의 권능 등에 관한 의미없는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예로, 예수님의 어느 쪽 옆구리가 창으로 찔렸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또한 족보 이야기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제사장의 후예나 아브라함의 후예로 높이기 위해 자기들의 족보를 성경의 인물과 연결시켜
만든 사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렇게 형식적이고 생명력이 없는 행위들을 어리석고 허탄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이런 것들은 어리석은 것일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에 많은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신앙의 연수, 직분,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크기 등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으나, 성도들이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명심하고 겸손한 자세로 복음만을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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