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5/22) 말씀 묵상 (시편 73편28절, Psalms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But as for me, it is good to be near God.
I have made the Sovereign Lord my refuge; I will tell of all your deeds.
 
이 시는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은 역대상 25:1절에 의하면 다윗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성전에서 찬송하는 악사들의
수석이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사람은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지만 반대로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사람은 복이라고 
선포합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이 위기에서 건져주시는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사람들은 대게 눈에 보이는 형통함을 좇아갑니다.  넓고 평탄한 길을 추구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집니까?  좋은 일만 생깁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삶에 어려움이 온다면, 위급한
상황이 생긴다면 어떻게 합니까?  누구를 의지합니까?  아무도 없을 수도 있고, 권세자나 전문가나 재력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과연 그들이 그 위기를 온전히 해결해줄까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영원한 형통함을 누립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지금도 그 분의 뜻대로
세상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 나아가면 구하지 않은 것도 받고 또한 구한
것보다 훨씬 좋은, 가장 좋은 것을 받습니다.  그러니 그 선하신 하나님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시고 신령한 복을 누리며 그 분을 증거하는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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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21) 말씀 묵상 (에베소서 5장31-32절, Ephesians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For this reason a man will leave his farther and mother and be united to his wife,
and the who will become one flesh.
This is the profound mystery, but I am talking about Christ and the church.
 
오늘은 5월 하고도 둘이 하나가 되는 21일 입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에서 사람이란 남자를 말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떠나라는 말은 부모를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또 생활적으로 독립하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결혼을 하면 부모중심이 아니라
부부중심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내들은 결혼을 함과 동시에 자동으로 남편의 삶에 1순위가 되는데
많은 남자들은 결혼을 해도 순위를 못 바꾸고 여전히 부모에게 의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정에 어려움이 많이
생기고 문제가 생겨도 해결이 아니라 더 문제를 키워갑니다.  자녀는 결혼을 할 때 독립해야 하고 동시에 부모도 자녀의
행복을 위해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가 연합한다는 것은 서로의 장점을 세워주고 단점을 덮어준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브 즉 아내를 만들어 주신 이유는 돕는 배필이었습니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기에 약한 부분을 채워주라는 겁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거나 자신이 편하려고 하면 동기가 잘못된 것이기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가 맞추어가고 서로 도와가면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닮아가기도 합니다.  그런 부부, 그런 가정을 
만들어 복의 통로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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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20) 말씀 묵상 (잠언 25장13절, Proverbs 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Like the coolness of snow at harvest time is a trustworthy messenger
to those who send him; he refreshes the spirit of his master.
 
본문에서 ‘충성된 사자’란 주인의 말을 정확하게 듣고 이해해서 똑바로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기쁘시게 하고 시원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충성된 사자가 되어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나의 말이 되어 나도 똑같이 말하고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씀하셨으면 나도 그래도 믿고 말씀과 똑같은 말을 하고
사는 자가 바로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시원하게 하는 자 임을 말씀합니다.  그렇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때 우리는 말씀이 삶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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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9) 말씀 묵상 (로마서 1장17절, Romans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t written; The righteousness will live by faith.
 
거듭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가진 의에 대해 확신이 없으면 믿음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어제도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응답하실까?’와 같은 이런 저런 의심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의는 나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의이므로 그것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의인의 간구가 되어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 뻔뻔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기 때문에 기도가 막히게 되겠지만 기도하러
나가는 자체를 막지는 못합니다.  분명히 우리의 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으로 보시고,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 말씀이기도 합니다.  (합 2:4)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짜로 의로워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주십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가 없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아닙니다.  죄인에서 용서받은 죄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가 이 땅에서 의인으로 살 길을 마련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죄의 행위에
집중하지 말고 의롭게 되었음에 집중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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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8) 말씀 묵상 (갈라디아서 1장4절, Galatians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Who gave himself for our sins to rescue us from the present evil age,
according to the will of our God and Father
 
본문은 복음의 핵심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함이라고도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는 마귀가 세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문화와 유행을 따라 살면서
마귀를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지 모르거나 알면서도 좋기에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마귀의 권세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한 세대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구원을 얻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서는, 결코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오직 우리가 살 길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세세토록 돌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고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은
자답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거룩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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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7) 말씀 묵상 (요한일서 3장16절, 1 John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This is how we know what love is, Jesus Christ laid down his life for us.
And we ought to lay down our lives for our brothers.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사랑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실제 몸으로 죽으신 것을 부정하는 거짓 메시지가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몸소 죽으심으로써
사랑은 실제로 실천하는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시대에도 거짓 메시지가 사랑에 대해 오해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갈수록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사랑을 감정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생명이 마치는
그날까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마음과 물질을 사용해 실제로 도우며 사랑을 해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함으로 나타나는 진정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생명을 얻은 신자는 그분과 같은 사랑으로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이타적인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믿음대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희생하는
사랑을 나눌 때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알게 될 것이고 도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마음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인생을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비록 잠시 낙심할지라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힘을 얻어 계속 사랑하는 성도가 되도록 애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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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6) 말씀 묵상 (역대하 20장12절, 2 Chronicles 20:12)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Oh our God, will you not judge them?
For  we have no power to face this vast army that is attacking us.
We do not know what to do, but our eyes are upon you.
 
모압과 암몬이 연합하여 유다를 쳐들어왔을 때 여호사밧 왕은 금식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여호사밧 왕의 태도를 보시고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이 전쟁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5절)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이기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겠습니까!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께 구한 것을 보면서 기도하는 자가 어떤 자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것은 바른 삶을 사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당당한 호소였습니다.  만약 그가 비록 왕이지만 바른 삶을 살지 못했더라면 하나님께 당당히 구원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여호사밧 왕처럼 승리해야 할 당위성에 대해 담대하게 하나님꼐 호소하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며, 바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도 야고보가 선포했던 것처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위기의 때에
하나님께 간구하지 전에 먼저 바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특권이요 기쁨이요 또한 의무입니다.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며,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가
승리케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삶이 기도 응답의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항상 승리할 것입니다.  그렇게 바른 삶을 살아가며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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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5) 말씀 묵상 (갈라디아서 6장6절, Galatians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Anyone who receives instruction in the word
must share all good things with his instructor.
 
사도 바울은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을 실제적인 견지에서 금전의 사용에 대해 적용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듯이, 그런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명령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역자들은 신앙과 생활의 규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에서는 항상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말씀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자들이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영적인 것으로 뿌리는 동안,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육신의 것을 거두는 것이 서로 공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원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10:10)  이렇게 볼 때 주의 종을 대접하는 것은 합당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를 물질적으로 궁핍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은 가르침을 받는 자가 마땅히 취할 예의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수 
있기에 가르칩을 받는 자들에게도 유익합니다.  만일 교역자가 굶고 있는 것을 보고도 이를 방관한다면 그 교회는 결코 건강한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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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4) 말씀 묵상 (요한복음 6장27절, John 6:28)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Do not work for food that spoils, but for food that endures to eternal life,
which the Son of Man will give you.  On him God the Father has placed his seal of approval.
 
예수님께서는 찾아온 무리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여기서 ‘썩는 양식’이란 영원하지 않으며 쇄해지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행하셨습니다.  영생하는 양식을 얻으려면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놀랍고 위대한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발견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새롭고 놀라운 일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적인 민감성을 키워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 넘어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믿음과 사랑을 성장시켜 주는
하나님의 계획이 될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언급했던 썩어져 없어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다보면
결국 우리의 인생이 이 땅의 것에 매이게 됩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는 자연적으로 멀어집니다.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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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3) 말씀 묵상 (역대상 29장12절, 1 Chronicles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Wealth and honor come from you; you are the ruler of all things.
In your hands are strength and power to exalt and give strength to all.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조상들을 보호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조상들에게 베푸신 것처럼, 지금도 당신의
백성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윗은 그렇게 완전성을 지니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가 찬양하고 있는
하나님은 모든 것의 정당한 소유자로서 최고의 통치권자이십니다.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그 분의 것이며,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으뜸으로서, 부와 명예가 모두 그 분께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또 그 분은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만유를 움직이시며 감화시키십니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누린 풍요와 영광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꼐 보답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에 지니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그 놀라우신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그 분의 주권과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경우, 찬양의 대상을 바르게 알 뿐만 아니라 왜 그 분을 찬양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깨달을 때에만 진정한 찬양을 드리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찬양을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십니까?  혹시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노력과 땀으로 이루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화자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교만이요 착각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존귀한 분으로 여기고
경외하는 자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지만 그렇지 않고 교만한 자는 멀리 하십니다.  모든 것을 거두어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고 찬양을 올려드시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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