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4/30) 말씀 묵상 (디도서 3장14절, Titus 3: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Our people must learn to devote themselves to doing what is good,
in order that they may provide for daily necessities and not live unproductive lives.
 
바울 사도는 디도에게 그레데 교회 성도들을 가르쳐서 사역을 위해 필요한 물질을 준비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텐트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자비량으로 사역을 감당했지만, 종종 성도들로부터 물질적인 후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가장 큰 후원자라면 빌립보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사역자들에게 갑자기 필요한 물질을 충당하기 위해서
미리 헌금을 모아 보관하라고 권합니다.  (세나와 아볼로) 또한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한 일종의 구제헌금을
미리 모아 두라고 권고한 적도 있습니다. (고전 16:1-3)
 
교회의 사역과 사역자를 돕기 위해 물질을 준비하는 성도들은 사역의 열매를 맺는 일에 동참하여 선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선한 일은 도덕적으로 선한 일과 세상에서 신자가 보여야 할 훌륭한 행동들을
가리킵니다.  사역을 위한 그리고 사역자를 위한 물질적인 후원도 선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한 마음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물론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기쁨으로 섬기며 후원하는 믿음의 동역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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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29) 말씀 묵상 (레위기 17장11절, Leviticus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For the life of a creature is in the blood, and I have given it to you
to make atonement for yourselves on the alter;
it is the blood that makes atonement for one’s life.
 
이 구절에서는 ‘피를 먹는 것’을 금지하는 율법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생명이 바로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 집 사람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이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사람의 영혼을 속하는 것은 피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죽을 수가 없기에 대신 자신이 가진 가축 중에서 귀한 것을 죽여야 했습니다.  즉 피는 생명이므로 짐승들이
그들의 피를 흘림으로서 사람 대신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단에 제물의 피를 뿌리거나 붓도록 지정하신 것은 희생제물의 생명을 죄인의 생명대신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대신 갚는 것이요 배상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선언했습니다. (히 9:22)  그들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떠한
피도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희생제물이 더 이상 죽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이 율법이 의미를 잃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피는 불완전하여 죄를 지을 때마다 죽어야만 되었지만
예수님의 피는 완전하여 한 번으로 세상 모든 죄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once for all)  더 이상 제물을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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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28) 말씀 묵상 (에베소서 4장26절, Ephesians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In your anger do not sin; Do not let the sun go down while you are still angry,
and 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
 
사람은 자신의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말과 행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사람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새 사람을 입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분노로 인해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누구나 화를 낼 수는 있습니다.  당연히 습관적으로 화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화가 났을 때는 하루가 지나가기
전에 해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의로운 분노라고 할지라도 오래 품고 있으면 마귀가 그 틈을 노려 우리를 죄로
이끌어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의 성도는 자기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에 분노를 늘 품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우리를 죄에 빠지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항성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가운데 오래 참음과 온유와 절제가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단순간에 되지
않기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에 사로 잡힌 사람이라는 의미도 되고 그리스도처럼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깊어질수록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삶이 세상에서는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믿음의 삶을 살도록 애쓰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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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27) 말씀 묵상 (이사야 61장11절, Isaiah 61:11)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
For as the soil makes the sprout come up and a garden causes seeds to grow,
so the Sovereign Lord will make righteousness and praise spring up before all nations.
 
하나님 앞에서 계속하여 죄를 지었던 남 유다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경고하셨던 대로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했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택함을 받은 남 유다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언되었던 대로 다시 자기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유다 민족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만 있을 뿐입니다.  즉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감사의 찬송이 당연히 있어야 하며, 그 찬양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또 땅이 싹을 내고 뿌려진 씨앗이 움터 자란다는 것은 곧 언약의 회복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홍수로 멸하신
후에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의 증거로 땅에 심음과 거둠이 계속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의 말씀대로 땅이 싹을 내고 그 싹이 자란다는 말은 말 그대로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이해를 할 때,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어 영생을 주시겠다는 언약의 증거를 가리킵니다.
 
이제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롭고 감사한 구원의 사역에 대하여 찬송하여야 하며, 이 찬송은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보여지는 천국의 모습은 밤낮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새 노래로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제사가 됩니다.  성도들은 찬송을 통하여 자신이
기쁨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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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26) 말씀 묵상 (요한복음 14장27절, John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I do not give to you as the world gives.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and do not be afraid.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평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소유하신 평안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엇인가?
바로 물질의 넉넉함이나, 건강이나, 성공 등에 의해 주어지는 평안입니다.  그런 것으로부터 평안을 얻는다면 만약
그것이 없어지면 평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다릅니다.  그것은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 전능자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어떤 평안이기에 흔들리지 않는가?  사라지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무서움이 많은 어린아이도 자기 부모가 곁에 있으면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면 왜 염려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그 분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라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한다면 미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확신하십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 가운데 주님의 일을 하십니까?  혹시 지금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다면 이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나아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믿음 없음을 고백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약속을 믿고 구함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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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25) 말씀 묵상 (시편 144편15절, Psalms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are the people of whom this is true;
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the Lord.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바로 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 성경이 말씀하는 복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번영과 풍요뿐이라면 우리 삶에 그것이 없을 때는 우리는 저주를 
받은 것이지요.  그래서 기복신앙이란 내 꿈과 내 소원을 하나님께 빌고 빌어서 하나님을 움직여서 나의 꿈과 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온갖 것을 동원하여, 온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꿈과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때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의심도 합니다.  그럿이 바로 기복신앙이요 그렇다면
기독교는 미신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 신앙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자신을 발견하고 날마다 자신을 
바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쉬레’ (복)의 뜻은 ‘하나님과 거리가 좁혀지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부와 선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짜 복된 인생인줄 믿습니다.
오늘도 창조주이시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는 복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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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24) 말씀 묵상 (야고보서 5장16절, James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Therefore confess your sins to each other and pray for each other so that you may be healed.
The prayer of a righteous man is powerful and effective.
 
‘신약의 잠언’이라고 불리는 야고보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야고보는 아주 의외의 말씀을 합니다.  그것은 병 낫기를 위해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라’는 겁니다.  그 말은 죄가 치유와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분리하며
기도의 응답을 막습니다.  그것 때문에 병이 들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계속 미워하는 것 때문에 생기는 마음의 병일
수도 있고,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을 낫기 위해 당연히 기도할 때 먼저 혹시라도
죄 때문에 생긴 병은 아닌지 모르기에 서로 죄를 고백하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합하기 위하여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을 치워버려야 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악인의 제사는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잠 15:8)  그래서 교회의 장로들 즉 교회의 영적인 리더를 청하셔 기도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영적인 리더가 죄가 없는 완전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래도 영적인 리더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좀 더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를 청하여 기도를 부탁하라는 겁니다.
 
성도간의 진정한 사랑은 아픔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과 아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담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단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꺼내기만 하면 일단 반은 치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마음에 쌓아둔 것으로 인해 생기는 병이 많고 또한 마음에 담아둔 것을 꺼내고 들어 줄 사람이 없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면 왜 들어줄 사람이 없는가?  그만큼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여깁니다.  혹시라도 마음 깊은 것을 
꺼냈는데 그것이 금방 소문이 난다면, 그것이 다른 사람을 통해 다시 듣게 된다면 얼마나 큰 상처가 됩니까?  그래서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에게 최선을 다해 돌보아야 할 지체가 있습니까?  혹시라도 그런 분이 있다면 시간과 물질을 주저하지 말고 나누어주면
좋겠습니다.  지식적이나 교훈적인 말을 많이 하기 보다는 우선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지 않는 죄가 없는지 돌아보고
도움이 필요한 지체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하고 기도해주는 믿음의 지체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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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23) 말씀 묵상 (전도서 7장7절, Ecclesiastes 7:7)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Extortion turns a wise man into a fool,
and a bribe corrupts the heart.
 
전도자는 탐욕과 뇌물의 유혹이 얼마나 사람에게 강한지,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까지 한다고
인정합니다.  사실 탐욕이 우리를 바로로 만드는 일은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흔한 사실입니다.  지금은 지혜자라 할지라도
탐욕에 오랫동안 노출된 삶을 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에게 걸맞는 않는 언행을 하기 쉬워지고,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외람된 말도 서슴없이 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은사까지도 파괴해 버리며, 우리로 하여금 판단력도 흐려지게
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은 결정과 태도를 갖게 합니다.  또한 뇌물도 사람의 지성과 미덕을 소멸시켜 버려서 더 이상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 되게 만듭니다.
 
이처럼 탐욕과 뇌물은 인간의 채울 수 없는 욕망에서 기인한 것으로, 끝내는 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자기는 물론 가까운 사람에게
조차 피해를 줍니다.  우리는 그런 지경에 가지 않기 위하여 늘 겸손으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감사하며
주야로 진리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고상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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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22) 말씀 묵상 (고린도전서 15장20절, 1 Corinthians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번째 열매가 되셨도다.
But Christ has indeed been raised from the dead,
the firstfruits of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만약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일부가 제기한 부활의 교리에 대한 이의는 신앙에 있어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부활이 없으면 성도의 믿음은 헛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부활의 중요성을 역설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을 결코 수고로이 여기지 않습니다.  이 15장 한 장 전체가 부활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장을 흔히들
‘부활장’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의 부활이 앞으로 있게 될 ‘죽은 사람들의
부활’의 선구이며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부활은 모든 성도의 부활의 기초이자 보증이 됩니다.  머리가 부활했으니
몸도 이미 부활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것처럼,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그를 믿고 구원을 얻을 사람 전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을 대표론 (typology)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을 잠자는 자들로 표현했습니다.  그 이유는 잠을 자는 사람은 반드시 다시 깨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언젠가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잠을 잔다고 한 표현은 적합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것도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이후로 지금까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전에도 죽었다가 다시 살림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로부터 살림을 받은 과부의 아들들이 있었고 죽었던 나사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림을 받았지만 다시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부활의 열매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까지 살아 계시기에 그 분이 부활의 첫 번째 열매가 되시는 겁니다.  마지막 때의
부활도 그렇게 됩니다.  다시 살아난 이후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코 남의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분의 부활은 그 분의 지체가 된 나,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 분을 따라 언젠가 반드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할 사람답게
가슴 뜨겁게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릴 뿐만 아니라 부활할 때 부끄럽지 않도록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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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21) 말씀 묵상 (창세기 2장18절, Genesis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I will make d helper suitable for him.’
 
이 구절은 사람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배려와 자상하신 관심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사람인 아담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셨고 또한 그에게 좋은 것, 즉 그가 홀로 지내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다.
아담 자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지만 좋지 않게 보신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홀자 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홀로 있으면 위안을 받지 못합니다.  사랑도 하지 못합니다.  또한 홀로 있으면 자신의 종족을 번성시키거나
유전시키지 못합니다.  세대가 이어지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남자와 여자로부터 비롯 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영원히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지어주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이란 적합한 조력자 또는 배우자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상태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서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완벽한 사람이었던 아담에게도 돕는 배필이 필요했다면 완벽하지 않은 우리는 말할 것도
없이 돕는 배필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관점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필요를 가장 완전히 아십니다.  그러니 그 분의 결정이 가장 최선입니다.  가장 잘 어울리는 아내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돕는 배필이며, 그런 아내가 있는 가정은 고독의 불만을 충분히 해소시켜 주는 곳입니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신의 돕는 배필에 감사하며 사랑하며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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