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5/20) 말씀 묵상 (잠언 25장13절, Proverbs 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Like the coolness of snow at harvest time is a trustworthy messenger
to those who send him; he refreshes the spirit of his master.
 
본문에서 ‘충성된 사자’란 주인의 말을 정확하게 듣고 이해해서 똑바로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기쁘시게 하고 시원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충성된 사자가 되어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나의 말이 되어 나도 똑같이 말하고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씀하셨으면 나도 그래도 믿고 말씀과 똑같은 말을 하고
사는 자가 바로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시원하게 하는 자 임을 말씀합니다.  그렇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때 우리는 말씀이 삶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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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9) 말씀 묵상 (로마서 1장17절, Romans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t written; The righteousness will live by faith.
 
거듭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가진 의에 대해 확신이 없으면 믿음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어제도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응답하실까?’와 같은 이런 저런 의심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의는 나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의이므로 그것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의인의 간구가 되어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 뻔뻔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기 때문에 기도가 막히게 되겠지만 기도하러
나가는 자체를 막지는 못합니다.  분명히 우리의 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으로 보시고,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 말씀이기도 합니다.  (합 2:4)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짜로 의로워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주십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가 없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아닙니다.  죄인에서 용서받은 죄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가 이 땅에서 의인으로 살 길을 마련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죄의 행위에
집중하지 말고 의롭게 되었음에 집중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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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8) 말씀 묵상 (갈라디아서 1장4절, Galatians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Who gave himself for our sins to rescue us from the present evil age,
according to the will of our God and Father
 
본문은 복음의 핵심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함이라고도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는 마귀가 세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문화와 유행을 따라 살면서
마귀를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지 모르거나 알면서도 좋기에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마귀의 권세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한 세대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구원을 얻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서는, 결코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오직 우리가 살 길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세세토록 돌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고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은
자답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거룩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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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7) 말씀 묵상 (요한일서 3장16절, 1 John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This is how we know what love is, Jesus Christ laid down his life for us.
And we ought to lay down our lives for our brothers.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사랑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실제 몸으로 죽으신 것을 부정하는 거짓 메시지가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몸소 죽으심으로써
사랑은 실제로 실천하는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시대에도 거짓 메시지가 사랑에 대해 오해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갈수록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사랑을 감정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생명이 마치는
그날까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마음과 물질을 사용해 실제로 도우며 사랑을 해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함으로 나타나는 진정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생명을 얻은 신자는 그분과 같은 사랑으로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이타적인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믿음대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희생하는
사랑을 나눌 때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알게 될 것이고 도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마음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인생을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비록 잠시 낙심할지라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힘을 얻어 계속 사랑하는 성도가 되도록 애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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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6) 말씀 묵상 (역대하 20장12절, 2 Chronicles 20:12)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Oh our God, will you not judge them?
For  we have no power to face this vast army that is attacking us.
We do not know what to do, but our eyes are upon you.
 
모압과 암몬이 연합하여 유다를 쳐들어왔을 때 여호사밧 왕은 금식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여호사밧 왕의 태도를 보시고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이 전쟁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5절)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이기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겠습니까!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께 구한 것을 보면서 기도하는 자가 어떤 자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것은 바른 삶을 사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당당한 호소였습니다.  만약 그가 비록 왕이지만 바른 삶을 살지 못했더라면 하나님께 당당히 구원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여호사밧 왕처럼 승리해야 할 당위성에 대해 담대하게 하나님꼐 호소하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며, 바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도 야고보가 선포했던 것처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위기의 때에
하나님께 간구하지 전에 먼저 바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특권이요 기쁨이요 또한 의무입니다.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며,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가
승리케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삶이 기도 응답의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항상 승리할 것입니다.  그렇게 바른 삶을 살아가며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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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5) 말씀 묵상 (갈라디아서 6장6절, Galatians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Anyone who receives instruction in the word
must share all good things with his instructor.
 
사도 바울은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을 실제적인 견지에서 금전의 사용에 대해 적용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듯이, 그런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명령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역자들은 신앙과 생활의 규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에서는 항상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말씀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자들이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영적인 것으로 뿌리는 동안,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육신의 것을 거두는 것이 서로 공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원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10:10)  이렇게 볼 때 주의 종을 대접하는 것은 합당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를 물질적으로 궁핍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은 가르침을 받는 자가 마땅히 취할 예의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수 
있기에 가르칩을 받는 자들에게도 유익합니다.  만일 교역자가 굶고 있는 것을 보고도 이를 방관한다면 그 교회는 결코 건강한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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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4) 말씀 묵상 (요한복음 6장27절, John 6:28)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Do not work for food that spoils, but for food that endures to eternal life,
which the Son of Man will give you.  On him God the Father has placed his seal of approval.
 
예수님께서는 찾아온 무리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여기서 ‘썩는 양식’이란 영원하지 않으며 쇄해지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행하셨습니다.  영생하는 양식을 얻으려면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놀랍고 위대한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발견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새롭고 놀라운 일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적인 민감성을 키워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 넘어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믿음과 사랑을 성장시켜 주는
하나님의 계획이 될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언급했던 썩어져 없어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다보면
결국 우리의 인생이 이 땅의 것에 매이게 됩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는 자연적으로 멀어집니다.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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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3) 말씀 묵상 (역대상 29장12절, 1 Chronicles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Wealth and honor come from you; you are the ruler of all things.
In your hands are strength and power to exalt and give strength to all.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조상들을 보호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조상들에게 베푸신 것처럼, 지금도 당신의
백성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윗은 그렇게 완전성을 지니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가 찬양하고 있는
하나님은 모든 것의 정당한 소유자로서 최고의 통치권자이십니다.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그 분의 것이며,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으뜸으로서, 부와 명예가 모두 그 분께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또 그 분은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만유를 움직이시며 감화시키십니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누린 풍요와 영광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꼐 보답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에 지니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그 놀라우신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그 분의 주권과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경우, 찬양의 대상을 바르게 알 뿐만 아니라 왜 그 분을 찬양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깨달을 때에만 진정한 찬양을 드리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찬양을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십니까?  혹시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노력과 땀으로 이루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화자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교만이요 착각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존귀한 분으로 여기고
경외하는 자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지만 그렇지 않고 교만한 자는 멀리 하십니다.  모든 것을 거두어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고 찬양을 올려드시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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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2) 말씀 묵상 (시편 24편8절, Psalms 24: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Who is the King of glory?  
The Lord strong and mighty, the Lord mighty in battle.
 
시인은 바로 앞 구절에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고 읊었습니다.  영광의 왕, 강하고 능하신
여호와,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께서 행차하셨으니 문을 열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문을 의인화해서 말합니다.  문들에게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는 것을 기뻐 반기며 그케 그 입을 열어 환영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요구에 대해 성전 문을 지키는
자들이 ‘이 영광의 왕이 누구시뇨?’라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다’라는 답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구원과 통치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도의 마음 안에 들어오시길 원하십니다.  그 전능하신 영광의 하나님께서 성도의
마음 중심에 좌정하여 계실 때, 성도는 세상의 온갖 환난과 역경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감히 그 분을 대적하고
이길 자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사탄이 강하다고 하지만 그 역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잠시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까지 내버려 두시고 계실 뿐입니다.
 
성도는 입으로만 주님을 ‘주인’ 또는 ‘왕’으로 인정할 것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주님의 전적인 통치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시간과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입니다.  어디든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을 받으면 그 때부터
그곳이 어디든 천국은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냥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면, 그 분이 우리 삶 중심에 오셔서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통치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그 분께서 우리를 온전히 다스리시도록 주권을 내어드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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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5/11) 말씀 묵상 (로마서 5장8절, Romans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세상 사람들은 상대의 모습에 따라 사랑을 베풉니다.  상대방이 잘 생겼거나 세상적인 지위가 높거나 가진 것이 많으면
일단 사랑을 쉽게 베풉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되면 쉽게 관계를 정리합니다.  이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방의 조건에 상관없이 포용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대신 죄의 대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 세상은 상상도 하지 못할 사랑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인이 영생을 
얻는 길이 열렸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사실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 놀라운 구원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즐거움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무리 상황과 환경이 어려워도 믿음의 사람은 오직 한 가지 구원을 얻은 
것으로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했던 말씅이기도 합니다. (합 3:17-18)
 
혹시 오늘이나 근래에 근심이나 낙심되는 일이 있습니까?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그래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기에 기뻐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런 기쁨을 보이지 못한다면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의 은총을 누리며 기쁘게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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