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9/10) 말씀 묵상 (마태복음 18장19-20절, Matthew 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Again, I tell you that if two of you on earth agree about anything you ask for,
it will be done for you by my Father in heaven.
For where two or three come together in my name, there I am with them.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둠의 영을 묶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풀어 이 땅으로 흐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최소 단위인 두 세 사람이 한 마음으로 모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마음이 되어 일할 때 하나님의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늘의 능력을 행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시기에, 이 사실대로 자신이 하실 것이기에 
믿음의 사람들이 합심해서 무엇이든 구하면 이루어 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성도들이 합심해서 구해야 할 것은, 형통도, 세상 권세도 아닙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용서함으로 그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사랑이 아니라 미움과 시기가 있으면 한 마음이 되겠습니까?
자신의 것을 구하면 한 마음이 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영혼 구원을 위할 때 한 마음이 되지 않습니까?
혼자 기도해야 할 때도 있지만 합심해서 기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개인 기도는 혼자서, 어디든 할 수 있지만 합심기도는
‘만민이 기도하는 아버지 집’인 교회에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이 때에 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기도함으로
하늘 문이 열리는 놀라운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고 더욱 기도에 힘쓰는 충성된 일꾼으로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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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9/8) 말씀 묵상 (예레미야 3장23절, Jeremiah 3:23)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Surely the idolatrous commotion  on the hills and mountains is a deception;
surely in the Lord our God is the salvation of Israel.
 
유다 백성들은 그들이 어려움과 위기에 처했을 때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우상에게 자신들을 고통에서 구해달라고
간구하였지만, 그들이 아무리 간구해도 우상들이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무인격이기
때문이며 참 구원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들에게 간구하는 것은 실로 헛것이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 구할 때만 구원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인내와 사랑을 무효화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문을 강제로 열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선택입니다.  자신이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임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습니까?  돌아오기를 간청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억지로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그 분께 돌아가면 그 분은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믿을 수 있습니다.  다시금 그 분께로 돌아가서 그 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아름다운 삶을 시작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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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9/7) 말씀 묵상 (히브리서 11장3절, Hebrews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universe was formed at God’s command,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what was visible.
 
히브리서 11장을 흔히들 ‘믿음장’이라고 말합니다.  이 긴 한 장 전체에 믿음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로 ‘창조의 믿음’입니다.  창조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감각으로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에 믿음을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보이는 세계를 존재하게 한 것이 보이지 않는 분이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창조의 믿음입니다.
 
그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혼돈 상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1:3)  이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까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보지 않고도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물리적 세계는 다른 물리적 존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창조)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은 바로 이 믿음을 소유했던
분들입니다.  그 분들이 소유했던 믿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진화론은 과학이 아닙니다.  과학으로도 입증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 계속해서 올리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수십 억 년이 지난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었던 것에서 오늘날과 같은 규칙적인
우주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과 같은 놀라운 생명체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똑 같은 지문이 하나도 없고 사람의 유전
인자를 결정하는 DNA도 다 다릅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가?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진화론은
그것을 주장하는 자들의 믿음일 뿐이지 절대로 과학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그들보다 더 확실한 창조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권세를 가지고 흔들림 없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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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9/5) 말씀 묵상 (사도행전 18장10절, Acts 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For I am with you, and no one is going to attack and harm you,
because I have many people in this city.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 하나님이 그의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의 인생길을
여시고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밤에 환상 가운데 말씀을 들었습니다. ‘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기에 그 누구도 자신을 해할 자가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이 말씀을 굳게 믿고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복음 증거자에게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따릅니다.  이는 복음 증거자가 받는 많은 축복들 가운데 하나 입니다.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의 동행은 우리가 영광 중에 보호받으며 인도함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복음 증거자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십니다.  때로는 함께 일할 동역자를 붙여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복음의 일꾼은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힘겨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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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9/4) 말씀 묵상 (잠언 3장7절, Proverbs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찌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Do not be wise in your own eyes; fear the Lord and shun evil.
This will bring health to your body and nourishment to your bones.
 
사람이 악에 빠지는 이유들 중에 하나는 자기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fear)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않는 자는 지혜의 근본이신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힘쓰며 그 결과 그가 악에서 떠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여호와를 경외’ ‘악에서 떠남’은 실제적 경건함의 두 가지 요소이며 그 대표적인 본보기가 바로 욥입니다.
 
지혜자는 이러한 경건한 삶이 육신을 강건케 하고 신선하게 하는 양약이 되어 골수 즉 뼈를 윤택하게 하는 유익을 준다고 합니다.
즉 이러한 선한 생활은 삶을 조화있고 질서 있게 함으로 영적인 면은 물론 육체적인 건강도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축복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의 영육간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보호하심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무엇에든지 자기 교만을 버리고 기꺼이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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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9/3) 말씀 묵상 (베드로전서 3장10-11절, 1 Peter 3:10-11)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For, ‘Whoever would love life and see good days must keep his tongue from evil
and his lips from deceitful speech.
He must turn from evil and do good’ he must seek peace and pursue it.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지상에서의 삶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내세에서의 구원과 기쁨을 얻기
위하여, 현재의 삶에서 유의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고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첫째,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간사한 말이나 독설을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영생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결코 현세의 인간관계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철저히 다스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드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셋째,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화평한 자는 복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팔복의 7번째, 마 5:9) 이것은 현실에 순응하는
비겁한 행위가 아니라 궁극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열정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이 화평을 위해 생명까지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인해 고난을 받으면서도 이런 삶을 사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그런 핍박을 피해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면서도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면 쉽게 원망하고 욕하고 덕이 
되지 않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영생을
소유한 자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삶을 사셨고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 
험한 길을 좇아갔고 그 길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런 삶을 살며 좇아오라고 하십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 가운데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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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9/2) 말씀 묵상 (시편 37편30-31절, Psalm 37:30-31)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말하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The mouth of the righteous man utters wisdom, and his tongue speaks what is just.
The law of his God is in his heart; his feet do not slip.
 
하나님은 의인을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악인이 의인을 살해할 기회를 찾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그냥 죽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재판 때에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어서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인을 보호하십니다.
 
의인의 특징은 그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그냥 의인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게 의인이 된 사람은 의인이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생각과 말, 그리고 삶도 의롭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진정한 의인이라면 삶에서 자신이 의인이 되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믿으면 빛의 자녀가 되기에 더 이상 어둠에 거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의 삶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생각에서나 말에서나 행동에서나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고 정의롭게 사는 진짜 성도로
날마다 거듭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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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9/1) 말씀 묵상 (고린도후서 5장13-14절, 2 Corinthians 5:13-14)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If we are out of our mind, it is for the sake of God; if we are in our right mind, it is for you.
For Christ’s love compels us,
because we are convinced that one died for all, and therefore all died.
 
사도 바울은 타자지향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만일 바울이 미친 것이라면, 그것조차도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듯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어떤 상태에 놓이든,
모두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사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중단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 같은 큰 죄인을 용서하신 그
크신 사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시키는 대로만 했습니다.  그 분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셨는데
자신이 어떻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겠는가고 간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세상을 품고 세상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도록 강권하십니다.  세상은 자신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구원의 통로 역할을
해 주어야 할 때입니다.  오늘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에게든 전하고 나누는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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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8/31) 말씀 묵상 (이사야 33장6절, Isaiah 33:6)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He will be the sure foundation for your times, a rich store of salvation and wisdom and knowledge;
the fear of the Lord is the key to this treasure.
 
신앙인들이 고난을 당할 때 가장 먼저 취해야 할 태도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피조물로서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단순히 무섭다는 의미가 아니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외함과 함께
감히 그 앞에서 경거망동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 자체나 고난의 상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그것이
너무 커서 감당이 되지 않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에 두려워할 때도 있지는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고난이 아니라 우리 삶의 든든한 기초가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왜 그런가?  그 분이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인도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고 그 분을 진심으로 경외한다면, 우리는 고난 중에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구원의 은혜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아는 거룩한 지혜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기회입니다.  그렇다고 그 분이 일부러 우리를 시험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선택을
한 결과든, 아니면 우리의 죄로 인함이든, 아니면 마귀가 준 것이든 고난을 만났을 때 우리의 반응이 곧 우리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욥과 같이
전혀 이유를 알 수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가장 먼저 나아가 물어야
답을 알 수 있고 고난도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을 하나님을 만나는 선한 기회로 삼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우리의 믿음을 끌어 올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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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8/30) 말씀 묵상 (디모데전서 6장16절, 1 Timothy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who alone is immortal and who lives in unapproachable light,
whom no one has seen or can see.
To him be honor and might forever. Amen!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죽지 않으시고 영원하십니다.  그래서 유한한 인생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절대로 다 알 수 없지만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어
그 분의 영원한 나라로 옮겨 가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또 볼 수도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눈으로 보이게 존재하신다면, 그 분은
더 이상 신비로운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죽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면 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을 사모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그 날을…
 
그러므로 우리는 눈으로 뵐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 뵙기 위해,  부지런히 하늘에 귀를 대고 하늘의 무궁무진한 신령한 
것들을 받아서 이 땅에서 승리하며 지내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만 존귀와 권능을 올려 드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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