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4/2) 말씀 묵상 (요한복음 4장14절, John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나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but whoever drinks the water I give him will never thirst.
Indeed, the water I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눈에 보이는 우물물은 마셔도 다시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생의 물, 곧 생수를 맛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주님께 생수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신의 가난한 마음을 토로한 것입니다.  아직 그녀는 우물과 생수를 잘 분간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자신의 인생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수를
맛보기 원한다면 예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기만 하면,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팔복의 첫 번째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께 나아감으로 구원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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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 말씀 묵상 (요한복음 11장25절, John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중 으뜸 되는 기적은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서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회생의 기적은 부활의 
확실성을 믿게 하시려는 의도에서 주신 것입니다.  즉, 믿는 자는 장차 부활할 것임을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나사로의 회생 기적은, 첫째,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이 응해진 경우입니다.  분명히 나사로는 믿고
죽은 경우입니다. 그에게는 장차 부활이 있을 것임을 확증해 보이신 것입니다.
둘째, 믿고 죽은 자에게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란 말씀도 하셨는데, 이는 믿고 죽은 사람들은 더 이상 영적으로
죽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한 것입니다.  물론 믿는 자에게 육체적인 죽음은 있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수면 즉 
잠자는 것입니다.  (고전 15:18, 살전 4:13, 4:15)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끝날까지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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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31) 말씀 묵상 (이사야 53장5절, Isaiah 53:5)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But he was pierc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crushed for our iniquities, the punishment that brought us peace was upon him,
and by his wounds we are healed.
 
이사야 선지자는 종이 당한 고난의 의미를 선포하면서 ‘그’와 ‘우리’를 대조시킵니다.  우리는 종이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징계를 당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종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상함을 당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비뚤어진 성향과 죄악 때문입니다.  
 
이제 선지자는 종의 고난이 가져다줄 좋은 결과들을 제시합니다.  반역의 결과로 주어진 것은 상처와 징계였지만
종의 고난은 우라에게’ 평화’를 가져오고 우리의 아픈 상처를 ‘치유’했습니다.  종은 스스로 ‘우리’의 고난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를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는 많은 놀라움과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십자가를 
사랑하고, 그 십자가를 자랑하면, 십자가의 능력과 은혜가 매순간 우리를 압도할 것이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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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30) 말씀 묵상 (요한복음 13장15절, John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I have set you an example that you should do as I have done for you.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이는 예수님이 행하신 세족의 의미를 바로 알고 그 분이 행하신 일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본은
실천적 섬김입니다.  그냥 발을 씻어 주라는 것이 아니라 발을 씻어주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많은 부분에서 
사람들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가르치는 것도, 소유하는 것도 아니요 오직 섬김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섬기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 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사랑과 섬김의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사랑할 때, 사람들은 우리가 누구의 보냄을 받았는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섬김을 동일하게
행하는 진정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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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9) 말씀 묵상 (마가복음 14장9절, Mark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erever the gospel is preached throughout the world,
what she has done will also be told, in memory of her.
 
오늘은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드린 사건이 있는 날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과 수치심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담하게 비싼 향유 한 병 모두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  (향유 한 병은 1년 동안의 품삯에 해당) 그리고는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충동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의 불평과 비난
속에서도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 일을 주님은 칭찬하시며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일도 증거하로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교만과 허울과 체면의 옷을 벗어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향한 섬김은 상대적이 아닙니다.  그저 따라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에 느껴지는 대로
하면 됩니다.  내가 귀히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헌신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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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8) 말씀 묵상 (마가복음 12장44절, Mark 12: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즉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They all gave out of their wealth;
but she, out of her poverty, put in everything-all she had to live on. 
 
예루살렘 입성 후 셋째 날에, 예수님은 성전 연보궤 앞에 앉으셔서 그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려고 전국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또한 그들 중에는 많이 헌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 예수님이 크게 칭찬하신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과부의 마음 속에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어도 예수님께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의 헌신을 격려하십니다.  헌금은 양이 아닌 질로, 헌금한 사람의 마음 가짐과 헌신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는 가난하고 연약한 성도들의 피와 땀과 노력과 눈물의 헌신으로 인해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는지 살펴보고 진정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행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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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7) 말씀 묵상 (마가복음 11장3절, Mark 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If anyone asks you, ‘why are you doing thins?’
tell him, ‘The Lord needs it and will sent it back here shortly.’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웅이나 왕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한껏 낮추신 겸손의 왕이십니다.
그 겸손의 상징적인 모습으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사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나귀 새끼는 다윗 왕가를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이미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던 말씀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는 교회는 예수님의 겸손과 평화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가 권력과 힘으로, 곧
영광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고 하면 필연코 타락하게 됩니다.  교회가 힘을 가지게 되면
부태하게 된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해서 또 주변을 통해서 알 수 있기에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역사상 교회 이름을 위한 선교나 혹은 교회의 이득을 위해 돈과 권력을 가까이 하고 종교 재판이나 혹은 정치에
개입하여 행하는 여러 불의한 일들을 다시는 재현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위치에 있든지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주의 사명을 감당하는 주의 제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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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6) 말씀 묵상 (누가복음 22장46절, Luke 22: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Why are you sleeping?’ he asked them,
‘Get up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인간으로 계시는 동안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이 감당하기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때가 가까이 오기 때문에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에 오르셨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 자신에게나 제자들에게나 힘겨운 시간이 될 것이기에 더욱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기도처인 겟세마네 동산에 함께 간 제자들은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잠을 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느끼시는 절박함과 힘겨운 상황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말씀을 새겨 듣지도 않고 그냥 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으나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했고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힘써 기도하셨습니다.  
 
여기 ‘일어나 기도하라’는 말씀은 시험에 들려고 할 때 누구에게나 필요한 말씀입니다.  ‘주여 이 위기에서 나를 
도우소서’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수록 우리는 더욱 힘써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주님께서 우리 기도의 자리에도 함께 해 주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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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5) 말씀 묵상 (스가랴 9장9절, Zechariah 9:9)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He is righteous and having salvation,
gentle and riding on a donkey, on a colt, the foal of a donkey.
 
오실 메시야, 그 분은 공의의 왕이요, 구원자시며, 전쟁을 폐하실 평화의 왕이십니다.  즉 메시야는 갇힌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분이시며, 당신의 백성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의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그 분의 통치하에서는 모든 사람이 공정하게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데, 이것이
메시야 통치의 속성입니다.
 
하지만 그 분께서는 사람들의 기대처럼 외형적으로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메시야로서 당신의 백성의 죄를 스스로
담당하실 평화의 왕으로 오십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체적으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혹시 이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할지라도, 우리를 위해 스스로 고통을 겪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받게 될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최후 승리를 믿으며 당당하게 진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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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4) 말씀 묵상 (욥기 13쟝23절, Job 13:23)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How many wrongs and sins have I committed?
Show me my offense and my sin.
 
너무나 큰 고통 가운데 빠진 신자라면 하나님이 모든 귀를 막으시고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얼굴을 가리지 마시고 나타나셔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많기에 이러한
고통을 당하는지를 알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녀 된 신자의 고통을 절대로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얼굴을 돌리시고 숨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고, 우리가 당하는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느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은
우리가 지은 죄의 형벌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이라면 지금보다 더 큰 고통과
심판을 당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황과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죄에서 사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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