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4/20) 말씀 묵상 (히브리서 12장28-29절, Hebrews 12:28-29)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Therefore, since we are receiving a kingdom that cannot be shaken, let us be thankful,
and so worship God acceptably with reverence and awe,
for our ‘God is consuming fire.’
 
하나님의 은혜는 흔들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를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줍니다.  율법은 그것을 다 지킬 수 없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고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두려움과 염려를 사라지게 합니다.
율법은 정죄하고 절망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율법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며 기쁨과 자유를 안겨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도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 수
있습니다.  의무감으로 힘들어했던 율법도 힘들지 않고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영원한 도성이요 우리가 가야 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합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춘 
인생을 살게 합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변하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구속의 은혜를 주신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더욱 그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죄를 심판하셔야 하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분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지만 그 은혜를 져버릴 때는 비록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지만 그 죄를 인해 징계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종말의 때에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습니다.
버리지 않으시고 징계를 통해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오게 하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산성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고 늘 은혜를 사모하며 은혜 가운데 사는 삶을 살도록 애쓰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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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9) 말씀 묵상 (이사야 48장9절, Isaiah 48: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For my own name’s sake I delay my wrath;
for the sake of my praise I hold it back from you, so as not to cut you off.
 
하나님께서는 택하셨던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참고 멸절하지 아니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참으시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범죄에 분노하여 택하신 그들을 멸망시키신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이방인들에 의해
손상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끝까지 참으시는 것 역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영원히 노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다리심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에 앗수르에 의해 망했습니다.  그리고 남 유다는 그들의 동족이 망한 것을 보고도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로부터 115여 년이 지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경고하셨던 말씀처럼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자랑하선 성전도 파괴를 당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남 유다는 하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심으로 완전히
멸하지는 않으시고 그루터기 즉 남은 자들이 있게 하셨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녀로 부름 받은 모든 믿음의 성도들에게 대하여도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힘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성도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변화가 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 기준으로 바로 바로 심판하시면 그 분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결코 역으로 이용하새는 안 되며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힘쓰며, 악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도록 애써야 하며, 심판을 더디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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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8) 말씀 묵상 (요한복음 11장25-26절, John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이 말씀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예수님께서 그의 누이인 마르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가장 강한 부활의 선언을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은 부활과 생명이 예수님에게 뿌리박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을 주목하여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부활을 언급하시고
그 다음에 생명을 언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씀은 부활한 다음에는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생명이 지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말도 바로 이 의미입니다.  그 분은 다시 살아나신 후 다시 죽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살아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날에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그리고 영원히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이 부활과 생명을 위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부활의 생명을 좀 더 설명한 것이 바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끝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자이신 메시아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때문에
그들 또한 죽어도 부활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영생이기에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우리는 신앙이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이 분명해지고 든든해집니다.  의심은 금물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일렁이는 배와 같다고 했고
그런 사람은 무엇을 구해도 하나님께 응답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선포했습니다.  만약 부활과 영생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오직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은 것이 전부요 죽으면 다 그만이라면 도대체 예수님을
믿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죽으면 그만인데 이 땅에서 말씀대로 바르게 살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영생 아니면 영벌이 있기에 우리는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어도 산다고 
하신 말씀을 믿은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이 땅에서 당당하게 살아감으로 부활의 증인 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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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7) 말씀 묵상 (이사야 32장8절, Isaiah 32:8)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거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But the noble man makes noble plans, and by noble deeds he stands.
 
‘존귀한 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나디브>는 ‘너그럽고 후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믿어 거듭난 사람들의
모습으로,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과, 기꺼이 섬기는 봉사의 정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최선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사용하고 내어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선을 행하는 일로 즐거워하며, 그렇게 행함으로
자신에게 유익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안정된 번영을 누리게 해 주시며,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듣는 것으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봉사할 때에도 어떤 대가나 인정이나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하는 섬기는 자체에서 기쁨을 맛보며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다는 영광과 감사의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럴 때 아름다운 열매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지경이 넓어지며 사람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그럴 때 무엇을 하든지 기쁨이 있고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런 모습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기뻐하실 충성된 일꾼의 모습이기에 더 큰 일을 하나님께서 맡기십니다.
 지금 우리의 계획은 무엇이며 섬기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존귀한 계획을 하는 존귀한 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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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6) 말씀 묵상 (마태복음 28장6절, Matthew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He is not here.  He has risen just as he said.
Come and see the place where he lay.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씀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초대교회의 핵심신앙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말은 믿지 않는 자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그 분을 진정으로 믿지 않고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자신의 죄를 
대신 사해주신 구세주로 믿는 자만이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죽음의 감옥을 부수고 나오셨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더 이상
빈 무덤에 머물러 계시지 않은 이유는 유대인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제자들이 군인들이 잠을 자는 사이에 시체를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 계실 때에 몇 번이나 말씀하셨던 대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죄의 권세를 멸하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망의 권세도 멸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찾아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무덤 역시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때 몸의 부활로 인해 빈 무덤이 되어 버릴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여 주님을 뵐 때에 부끄럽지 않도록 거룩한 삶,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부활을 꿈꾸며 살아가는 진정한 성도의 삶입니다.  부활주일은 하루로 끝나지만 부활에 대한 소망은 날마다 
간직하고 살아서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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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5) 말씀 묵상 (이사야 53장5절, Isaiah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But he was pierc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crushed for our iniquities;
the punishment that brought us peace was upon him, and by his wounds we are healed.
 
이 구절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에 대한 말씀 중 네 번째로 가장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그리고 실제로 받으신 고난의 참된 의미가 묻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그 분이 고난을 받으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모든 고난이 오직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되어졌다는 위대한
진리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가시관과 못과 로마 군인들의 창에 찔려 상함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그는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죽을 지 모르기 때문에 40대 이상을 허용하지 않는 유대의 율법에 따라 채찍질을 당한 것이 아니라
로마 사람들의 관례대로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의 결과에 대해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된 것’이라고 결론 짓고 있습니다.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쓰고 죄인으로 분류가 되어 채찍에 맞고 조롱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는 그 분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받으신 고난의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때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그 분이 가셨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느껴집니까?
주님의 죽기까지 하셨던 순종이 보입니까?  그게 바로 우리 자신 때문임이 깨달아집니까?  십자가의 도를 바로 알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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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4) 말씀 묵상 (누가복음 23장46절, Luke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시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Jesus called out with a loud voice,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his last.
 
‘이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는 말씀은 흔히 말하는 가상칠언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 박혀 있는 상태에서
하신 7 말씀 가운데 제일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 마지막 말씀은 외침이라기 보다는 기도로 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시편 31편
5절에 있는 말씀으로, 경건한 유대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잠드는 것을 죽음의 문턱에
서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을 알아야 합니다.  그 고통은 사람이 감당키 정말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직접 겪어볼 수가 없기에, 겪어본 것이 아니기에 그 고통을 그대로 알기는 어렵지만 얼마든지 생각은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십자가의 고통을 알면 알수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크기와 깊이를 더 알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가 마음에 깨달아질 때 우리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더 나아가 죄에 대해서 싸우고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염려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강 가운데 주님께 삶을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매달려 계시면서 고통 속에 올려드렸던 기도를 묵상하면서 그 분이 받으신 고난이 누구를
위함이며, 무엇 때문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주님 앞에서 겸손히 그리고 진실되게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할 것은
결단하는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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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3) 말씀 묵상 (누가복음 22장44절, Luke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And being in anguish, he prayed more earnestly, 
and sweat was like drops of blood falling to the ground.
 
이제 죽음을 앞둔 예수님은 마지막 길이 힘드시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기도에 온 힘을 다하고 간절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잘 드러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너무 무거우셨기에
제자들에게도 기도해 달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잠을 잤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도하라고도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잤습니다.  너무 믿음이 좋은 것인지, 그런 상황이 오지 않는 것을
확신해서 그런지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잠을 잤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더욱 힘쓰고 애썼다’는 표현 속에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사랑과 연민의 몸부림이었다는 사실과 거기에는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고민하시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그 길은 마땅히
가야하시는 길이지만 너무 힘드셨기에 그 잔이 지나갈 수만 있다면 지나가기를 바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기도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겠다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수록 예수님처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알고도 힘이 드는 경우 쉽게 포기하고 쉬운 길로 가기 십상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도 엄청난 육체적인 고통이 수반되는 것인데
더욱이 죽으셔야 하는 그 길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고민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그것을 마음에만 두지 않으셨고 그렇게 가까운
하나님 아버지께 있는 대로 고백하셨습니다.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분명한 뜻을 아셨기에
마지막 순간에는 순종하겠다고 결단하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지금 눈앞에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 죽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쉽게 자신을 합리화 하거나 변명을 대거나 하면서 피하려고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의 분명
옳은 길이요 가야만 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힘들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힘들수록 더 기도에 힘씁니까?  기도의 질은 어떻습니까?  마음을 이미 졍해놓고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해결해주시기만 애쓰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요구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기도가 그렇다면 그것은 미신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자신의 기도생활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힘쓰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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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2) 말씀 묵상 (누가복음 22장3절, Luke 22: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니라.
Then Satan entered Judas, called Iscariot, one of the Twelve.
And Judas went to the chief priests and the officers of the temple guard
and discussed with them how he night betray Jesus.
 
본문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줄 방도를 의논하고, 돈을 주기로 약속하며, 이를 유다가 허락하는 내용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철저히 준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 분위기의 총 연출자는 누구인가?  가룟 유다인가?
아닙니다.  가룟 유다에게 들어간 사탄입니다.  사탄은 유다와 대제사장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것을 실패로 만들려고 작정하고 계획을 진행시켰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을 시험했고 그 시험이 
실패했지만 예수님을 완전히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기회를 노렸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베드로에게 들어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 못하도록 책망하는 말도 서슴없이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가룟 유다를 통해 그리고 늘 예수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잡아서 죽이려고 했던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 이제 그 모든 것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사탄은 십자가를 통헤 죄의 권세가 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의 도가 전해지지 못하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던 사탄이 오늘날을 사는 믿음의 
사람들을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겠습니까?  절대로 사탄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만약 믿음의 
사람들이 죄에 빠져 살고 있다는 그냥 내버려두지만 만약 지금도 열심을 내어 섬기고 전도하는 성도는 자신에게 최대의
위협이 되기에 절대로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는 가장 큰 유혹이 되는 재물이나 명예나 육체적인 종욕을 
채워주는 것으로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사탄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도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교회들이 갈라지고 문을 닫고 세상에 덕을 끼치지 못하는 행동도 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기도 하지만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때로 그런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다시 일어나서
교회를 굳게 붙들고 계시는 예수님과 십자가를 굳게 붙들고 사탄의 궤계와 싸워야 합니다.  오늘도 고난주간을 묵상하며
주님과 십자가를 굳게 붙들고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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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1) 말씀 묵상 (마태복음 26장2절, Matthew 26: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As you know, the Passover is two days away–
and the Son of Man will be handed over to be crucified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아셨고 제자들에게 이 시간이 되기 전에 몇 차례나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3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삶을 나누었던 자신의 제자의 손에 의해 팔려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그렇게 자신의 고통과 아픔과
제자들에게 토로 하셨을 때에 과연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정을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이
무엇을 얻을까에 큰 관심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자신들의 큰 기대가 무너지는 것이기에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꾸짖으며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까지 했습니다.  (마태복음 16:22)
 
그렇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말씀하셔도 과연 우리가 그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일까요?  또 우리를 위해 죄가 없으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고난주간을 지내며 아들을 죽게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깊이 깨닫고 그 모든 것이 바로 죄 때문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예수님을 믿기 전과 같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양심에 찔림도 없었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백성으로, 예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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