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3/21) 말씀 묵상 (예레미야 14장22절, Jeremiah 14:22)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나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모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Do any of the worthless idols of the nations bring rain?
Do the skies themselves send down showers?  No, it is you, O Lord our God.
Therefore our hope is in you, for your are the one who does all this.
 
유다 백성에게 임한 기근은 단순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외에 어떤 우상이나 하늘도 그 분의 심판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됩니다.
생명도 없고 능력도 없는 이방인의 헛된 우상들을 의지해서 자신들의 번영과 안정에 대한 보증을 받기 원했던 백성과는 달리
예레미야는 참 신이시며 창조주이신 능력의 하나님께만 그의 기대를 두고 도움을 호소합니다.
그는 유다 백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자비를 간청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호소하는 듯합니다.
 
지혜자와 권세자와 능력자들의 힘으로 세상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국제기구와 제도가 교육이 인간의 운명을 바꾸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도움은 줄 수 있고 변화는 줄 수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을 바꾸시며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분께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리의 운명을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간구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머리로는 그렇게 믿으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못한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과 역사를 보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닌지요?
종종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심지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아닌지…  다시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 분만 믿고 따라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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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0) 말씀 묵상 (마태복음 6장24절, Matthew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No one can serve two masters.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he will be devoted to the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한 사람이 두 말에 동시에 오를 수 없으며, 두 활을 동시에 당길 수 없음 같이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를 중히 여기면 다른 하나를 경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100% 충성이요 
100% 순종이지 반쪽짜리로는 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지 못합니다.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재물은 Mammon으로 ‘재물 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재물 신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한 편을 사랑하면 다른 한 편은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중간이 있을 수 없고 거기에 똑 같은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연인 관계나 부부 지간에 한 사람이 파트너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또 사귄다면 그게 온전한 사랑이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두 가지를 비교하고 계신데, 그 비교가 맞지 않습니다.
한 분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고 다른 한 쪽은 재물 즉 돈입니다.  재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지 그것은 하나님과 비교할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재물을 하나님과 비교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재물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이 크고 유혹도 크다는 말입니다.  아니라고 말할 지 모르지만 돈은 그만큼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이 그렇지 않습니까?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 아닙니까?  그러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돈을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려고 합니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잠시 감옥에 가거나 법은 어길 수 있다고 여깁니다.  심지어 방해가 된다면 사람도 죽입니다.  그러니 그 돈이 주는 유혹이 얼마나 큽니까?  
돈을 사랑하는만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돈을 섬기는 것은 부딪히기 때문에 절대로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약함과 악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니 틀림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물질관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관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까워하면서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에는 아낌 없이 물질을 투자한다면, 없으면 빚이라도 내서 산다면 과연 그 사람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고 있는 겁니까?  
그러면서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돈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면,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게 됩니다.  때로는 치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바르게 정당하게 노력해서 돈을 버시고 사용하시면 됩니다.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가겠습니까?  진정한 기쁨은, 영원한 기쁨은 하나님을 위해 물질을 벌고, 관리하고, 쓰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르게 청지기 정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영원히 썪지 않는 하늘나라에 상급을 쌓는 것이고 그 분께 가면 큰 칭찬과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과연 우리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시고 다시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고 그 분만 주인으로 모시는 충성된 종, 자녀, 일꾼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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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9) 말씀 묵상 (시편 46편5절, Psalms 46: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God is within her, she will not fail.  God will help her at break of day.
 
레위 지파 가운데 한 부류인 고라 자손인 시인은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가 언급한 찬양의 내용은 성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주변 나라들이 떠들며 하나님의 성을 공격해 왔고
왕국은 흔들릴 정도로 위기에 처했습니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기에 고대 전쟁에서는 식량과 물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적들이 오래 성을 에워싸고 있으면 물을 공급하는 우물이 성 안에 없으면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게 되는데 그게 바로 히스기야 터널을 통해 들어오는 실로암 물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예루살렘 성 안에 시내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편 저자는 한 시내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시내는 바로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그 성이 무너지겠습니까?  외적이 아무리 막강한 화기로 무장하고 연합하여 공격해도
그 분이 계시기에 안전하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성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새벽에 도우신다고 고백합니다.
문자적인 뜻은 ‘아침의 기점에서 하나님이 도우시리이다’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침에 임한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사상입니다. (5:3, 90:14, 143:8)  이것은 날마다 태양이 떠오르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 번 소리를 내시자 땅이 녹았다고 선언합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피난처가 되신다면, 아무리 막강한 적이 수없이 몰려와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이것은 그 분이 주신 약속입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분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분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원하는대로 건져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분의 섭리를 모릅니다.
때로는 순교당하게 하실 수도 있고, 때로는 가진 것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중에서도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두려움없이 당당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적들은 비록 해하는 힘을 가졌지만 오히려 두려워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를 구원하시고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고
선포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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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8) 말씀 묵상 (로마서 15장20절, Romans 15:20)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It has always been my ambition to preach the gospel where Christ was not known,
so that I would not be building on someone else’s foundation.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의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 지금까지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신의 활동이 거둔 사역의 성공에 대해 언급한 다음 이 본절에서부터는 서양 (유럽)에서의 미래 사역과 로마 방문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 그가 항상 자기 사역의 지침으로 삼아왔던 원칙을 로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상기시킵니다.
그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사역의 원칙이 무엇인가?  바로 이미 다른 전도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곳에서는 전도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한다는 철저한 신앙적 의미로 하는 말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이미 다른 전도자가 확실하게 복음을 전파한 곳에서는 더 이상 전도하지 않겠다는 깊은 선교 정책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것은 그의 강한 자존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될 수 있는대로 복음을 듣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겠다는 뜨거운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개척자의 사명을 가지고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가져 가려는 그의 선교적 야망이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선교와 전도 원칙은 오늘날 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커다란 교훈과 도전을 줍니다.  그것은 전도란 소위 ‘교인 뺏기 쟁탈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닥치는 희생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해산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기쁨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런 사역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지금도 그런 전도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바로 그 전도자는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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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7) 말씀 묵상 (창세기 3장19절, Genesis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By the sweat of your brow you will eat your food until you return to the ground,
since from it you were taken;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에 대해 분명히 심판을 하십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대햔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앞에서 다스린 모든 것들을 다스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주셨지만 사람은 죄를 범한 후 고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랑하고 돕도록 창조하신 아름다운 부부 관계가 서로 지배하려는 종속적이고 고통스러운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풍성한 먹을거리를 그냥 먹는 대신 한평생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범죄로 인해 보시기에 좋았던 자연 세계도 저주를 받아 황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뱀의 말을 들음으로 축복으로 받은 모든 풍요로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요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고통스러운 심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원래 만들어졌던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죄를 매혹적으로 보이게 하는 미혹에 속지 마십시오.  죄의 마지막은, 죄의 대가는 바로 죽음입니다.  그 어떤 죄도 결코 가볍에 여겨서는 안 됩니다.
마귀는 죄를 짓기 전까지는 ‘딱 한 번만’ 해보라며 달콤하게 유혹을 하다가 일단 한 번 죄를 지으면 그 다음에는 다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정죄합니다.  ‘네가 그러고도 하나님의 자녀냐?’  ‘네가 그러고도 뻔뻔스럽게 예배를 드리러 갈 수 있느냐?’  등등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도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범하더라도 회개하여 죄에서 돌이키면
다시는 그 죄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 지은 죄에 대해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좋은지요.
가장 먼저는 죄의 심각함을 깨닫고 죄를 멀리하는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똑같은 죄를 범하더라도
회개하면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죄에서 떠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감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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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6) 말씀 묵상 (고린도후서 5장21절, 2 Corinthians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신 이를 우리로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God made him who had no sin to be sin for us,
so that in him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죄가 없으신 아들 예수님을 마치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죄의 대가를 대신 지고 죽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크신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구원을 화해라는 아름다운 용어로 설명한 것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개념이 아름다운 것만큼이나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권면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자신의 죄값을 대신 갚아주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음과 동시에 한 가지 임무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도 화목하게 하는 일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듯이 우리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로를 믿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요 그런 무리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공동체도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사명은 먼저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교제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 이 땅에 평화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도 바울의 권면은 다시 한 번 21세기에 존재하는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 아니라 오히려 화목을 깨뜨리고 덕이 되지 않는지 모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오히려 ‘싸우는 곳’으로 여깁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생겼던 문제는 오늘날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냈던 편지가 바로 우리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로 여기고 말씀으로 돌아가 순종할 때
그런 문제들이 사라지고 진정한 평화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는 복음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까?  화목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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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5) 말씀 묵상 (레위기 19장32절, Leviticus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아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Rise in the presence of the aged, show respect for the elderly
and revere your God.  I am the Lord.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은 공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노인은 인생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회중이 모인 자리에 노인이 들어서면 그를 공경하는 의미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예를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전으로 전수되던 시대에는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한 증표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사회를 정죄했습니다. (사 3:5절)  이렇게 노인을 공경하라는 의미를 통하여
모든 윗사람을 존경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노인 문제는 (aging)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각 가정에서 신앙적인 타락과 핵가족화로 인한 이기적인 삶의 추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질실한 신앙은 기본적인 예의 범절을 지키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그저 신앙적인 열심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예의 범절, 법을 잘 지키는 것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됨을, 그럴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됩니다.
 
노인을 공경함에는 가장 먼저 나이드신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나이든 부모를 버리는 고려장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치매나 거동이 불편한 부모를 버리거나 잘 모시지 않는 자녀들이 적지 않습니다.  돈이 없는 부모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부모에게는 그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억지로 부모를 찾아가고 공경하는 척 합니다.  이제는 부모 공경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이익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2천여 년 전에 사도 바울은 경고를 했습니다.  말세가 되면 부모를 공경치 않는 것이 그 현상 중의 하나라고 선언했는데 우리 세대에서 그 예언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을 향한 계명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에 관계된 계명도 주셨습니다.  그것이 5번째부터 마지막 10번째 계명입니다.  인간 관계에 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는 장수와 형통의 복을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고령화 문제는 갈수록 사회적인 문제가 되겠지만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그런 분들을 공경할 때 풀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자녀를 낳지 않거나 한 명 정도밖에 낳지 않는 가정이 많기에 사회에 일을 할 사람이 
극히 부족합니다.  갈수록 더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 빈자리를 나이드신 분들이 메우고 있습니다.  그 분들은 경륜도 있기에 필요합니다.  그러다보니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거기서 세대간의 갈등이 생기고 분열도 생기고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물론이고 신약시대에도 부모를 포함한 나이가 드신 분들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척도입니다.
오늘도 부모님들은 물론 만나는 나이드신 분들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잘 모심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복도 누리는 믿음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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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4) 말씀 묵상 (요한1서 4장16절, 1 John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s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해서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지식이 믿음보다 선행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느나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이 지식보다 선행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 6:69절)  그러나 지식과 믿음은 어느 것이 먼저 되고 어느 것이 나중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써 알게 되고, 또 알게 됨으로 믿게 되는 것이기에 이 앎과 믿음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안 되에 행한다는 뜻으로, 믿음의 행위와 같은 의미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 분의 사랑도 함께 거하기에,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할 줄을 모릅니다.  받아본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할 때 드러나고, 그 사랑은 점점 깊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이루어질 온전한 사랑을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은 지식과 믿음의 결합체로서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 같은 죄인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하시기 위해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분이 가지고 보여주셨던 사랑입니다.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크신 사랑을 직접 목격했던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자신의 죄를 사해주신 구세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인에서 용서받은 죄인이 되었고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에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오늘도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눔으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는 빛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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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3) 말씀 묵상 (이사야 25장11절, Isaiah 25:11)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O Lord, you are my God; I will exalt you and praise your name, 
for in perfect faithfulness you have done marvelous things, things planned long ago.
 
선지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또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로 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모든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새롭고 놀라운 것으로 보이는, 이 기사들은 하나님께서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해오셨습니다.
그러니 그 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 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정하신 뜻을 우리 인생이란 수레바퀴에서 성실하고 진실되게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과 처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마지막인 150편에서 ‘호흡이 있는 모든 자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라고 선포한 이유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상황이 나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들고 찬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우리의 의지를 꺾고 그 분의 섭리를 믿으며 그 분을 찬양할 때 우리 삶이 놀랍게 달라집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신령한 복을 받는 준비된 그릇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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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2) 말씀 묵상 (히브리서 13장7절, Hebrews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알려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Remember your leaders, who spoke the word of God to you.
Consider the outcome of their way of life and imitate their faith.
 
말씀을 인도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중에서 우러나옵니다.
우리는 늘 부족하고 연약해서 누군가의 지도를 받고 순종해야 할 자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겸손에서 지도자에 대한 겸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지도자들을 세워 성도들을 가르치며 목양하며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기억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제자의 삶은 모델을 보고 따라함으로 습득하는 생각과 실천과 습관입니다.
 
우리가 성공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선배,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성도들을 지도하던
교회의 지도자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전해주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들이 보여준 믿음과 선한 행실을 
되돌아보고 따라갈 때 우리의 신앙도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말씀 인도자들이 즐겁게 그 일을 하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결국 그들의 수고로 인한 유익은 성도들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역자들은 성도들이 순종하고 자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리더들도 인간적인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에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본받고 따라가야 할 리더가 없다고도 합니다.
그렇다고 혼자 지낸다면 신앙이 자랍니까?  비판만 하고 불평만 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집니까?  오히려 더 위험과 유혹과 자기 집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쓴뿌리가 커져가고 그로 인해 신앙이 크게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리더로 믿고 기도하며 서로 권면하고 고쳐나갈 때 믿음의 공동체가 바로 설 뿐만 아니라 믿음도 성숙하게 되고 자신도 본이 되는 리더로 변화하게 됩니다.  자신이, 세워진 리더를 잘 따라 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바른 말씀을 좇아갈 뿐만 아니라 리더의 연약함을 위해 기도하며 채워가는 성숙한 믿음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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