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3/31) 말씀 묵상 (시편 18편6절, Psalms 18: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In my distress I called to the Lord; I cried to my God for help.
From His temple He heard my voice, my cry came before Him, into His ears.
 
시편 18편은 다윗이 쓴 시입니다.  이 시를 통해 다윗이 얼마나 큰 위험에 빠져있는지, 그의 대적들이 얼마나 큰 힘으로 
그를 엄습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성전에서 들으시고 그 기도를 열납하셨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부르짖었다’는 말은 그가 기도하면서
지녔던 마음의 열성과 진지함을 가리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들으셨다는 것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다윗의 모든 기도를 열납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이 비록 절박한 상황에 처했지만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그 위기를 벗어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는 겁니다.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도 기쁘지만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사실 또한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에게 의뢰할 수 없기에 할 수 없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오직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확신하고 그 분께
간절히 메달린 것입니다.  바로 그런 중심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 기도를 응답하신 것입니다.
 
때로 믿음의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살다가 보면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지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눈앞의 상황에 압도되어 탄식하고 원망하고 절망하며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사방이 막혔다고 할 지라도 늘 한 곳, 즉 위는 열려있습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그 분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 
옵니다.  그 때가 바로 다시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부르짖으면 그 분은 항상 어디에 있든지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지금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모든 것이 형통하십니까?  감사함으로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며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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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30) 말씀 묵상 (야고보서 1장19-20절, James 1:19-20)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My dear brothers, take note of this;
Everyone should be quick to listen, slow to speak and slow to become angry,
for man’s anger does not bring about the righteous life and God desires.
 
야고보서는 ‘신약의 잠엄’이라고 불립니다.  그만큼 삶의 구체적인 교훈들이 들어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듣고 말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인 교훈을 줍니다.
우선 성도는 듣기는 속히 하라고 합니다.  즉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에 앞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먼저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는 ‘말하기는 더디하라’는 겁니다.  대화의 내용을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성급하게 말하는 과오를 범하지 말라는 겁니다.  즉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말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교훈합니다.  이런 모든 교훈은 성도가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닮아가도록 애쓰라는
말입니다.
 
듣기는 싫어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전문 분야는 들어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의사와
상담가들입니다.  흔히들 이렇게도 말합니다.  ‘속에 있는 것을 꺼내놓으면 반은 치유된 것이다’  정말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마음에 담아두기 때문에 병이 생깁니다.  들어주는 사람에게 친구가 많은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분노를 억제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선포합니다.
물론 사람이 분을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분을 내는 것이 습관이 되거나 생활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만약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복음을 전하기 어렵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주는 교훈은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의 대인관계에 꼭 필요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과연 나의 듣고 말하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잘 들어주고 말하기는 더디합니까?  그리고 상대방이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선 화부터
내는 태도가 습관처럼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 야고보의 교훈을 기억하고 말 하는 것은 줄이고 많이 들어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풀어주고 치유하는 성도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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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9) 말씀 묵상 (잠언 16장17절, Proverbs 16:17)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
The highway of the upright avoids evil;
he who guards his way guards his life.
 
정직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할 대로는 바로 악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에 반드시 승리와 평안이
보장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어려움이 없다거나 희생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길을 미워하는 자들로 인해
더 심한 반발과 대항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의의 하나님께서 궁국적으로 승리케 하십니다.  그러니 그런 사실을 믿고 반대와
역경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영혼을 지키는 것은 정직한 사람들의 관심사이며, 자기의 행할 바를 고수하는 사람은 자기 행복을 고수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 ‘대로’가 바로 악을 떠나는 방편이 되는 이유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가는 지혜자의 생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정직한 자로서,
악이 인도하는 위험한 곁길을 피하고
인생의 대로를 걸어가야 합니다.  
 
이 길은 좁고 꼬불꼬불하여 많은 사람들이 가기를 싫어하는 길입니다.  그렇지만 그 마지막은 승리요 영혼이 보장되며
생명이 있는 길입니다.  한 순간의 편함과 이익을 위하다가 보면 영원한 생명을 놓치게 됩니다.
넓고 평탄하고 쉽지만 파멸로 가는 길과 좁고 꼬불꼬불하여 힘든 길이지만 생명이 있는 길,
둘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하여 가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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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8) 말씀 묵상 (로마서 12장14-15절)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Bless those who persecute you; bless and do not curse.
Rejoice with those who rejoice; mourn with those who mourn.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실제로 용서해 주고 더 나아가 복을 빌어주기까지 한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하고 연약한 성품으로
볼 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에게 피해를, 손해를 입힌 자에게 우선 보복하려 하는 격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비록 자제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원수에게 재난이나 손실을 어떤 방법이든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이
일반적인데 오히려 그 원수가 잘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렇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기도 하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성품이 변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는 개인 위주의 사고 방식을 바라고 이타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함도 배웁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잘못되는 것을 속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까지도 합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다!’
 
하자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이웃이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에
이웃과 함께 진심으로 동고동락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가족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 즉 타국인이나 그 이상의 사람들과도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삶을 살 때 한 영혼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시대가 워낙 악하기에 가족이 잘 되는 것조차 배 아파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족은 서로가 잘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한 가족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마음 가짐이 어떤지 돌아보고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덮어주고, 기도해주는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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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7) 말씀 묵상 (예레미야 6장15절, Jeremiah 6: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Are they ashamed of their loathsome conduct? No, they have no shame at all;
they do not even know how to blush.  So they will  fall among the fallen;
they will be brought down when I punish them, says the Lord.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남 유다를 멸하시겠다고  그들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한 백성을 심판하시려고 하시는가?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고 계심을 알고서도 그 분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어떤 죄악들인가?  불신과 탐욕과 거짓과 자기 의로 인한 고집과 위선의 죄들입니다.  그들은 공의로우신 심판주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날마다 죄를 범하기에 날마다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갔습니다.
 
그들은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더 죄를 짓기에 담대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죄에서 떠나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됨이 없이는 어떤 선한 행위로도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비록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들이 쌓은 죄로 인해 때가 되면 벌을 내리시고 그들을 파멸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계속해서 선지자를 통해 심판의 경고를 주십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 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은 없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한 그들은 진노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의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 때가 되면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준비하지 않는 자들 역시 갚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시작이 있듯이
세상 마지막도 반드시 있습니다.  기독교는 힌두교나 불교처럼 윤회 즉 돌고 돈다넌 윤회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창조와 함께 시작된 역사가 이제 점점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음을 성경을 통해 알려줍니다.  그 마지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그 시와 때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점점
그 날이 가까워져 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날이 가까이 옴을 알고 날마다 죄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입니다.  깨어서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준비하는 삶을 사십시다!
직선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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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6) 말씀 묵상 (고린도전서 8장6절, 1 Corinthians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Yet for us there is but one God, the Father, from whom all things came and for whom we live;
and there is but one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all things came and through whom we live.
 
사도 바울이 살던 당시의 세상 사람들은 많은 신과 주를 임으로 만들고 그런 것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보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도 다른 신이나 주와 비교가 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창조의 실제적 역할을 담당했던 분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주란 원래 이 세상의 각 지역을 담당하는 권세자들 즉 임금이나 상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주라는 의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킵니다.  그 분만이 진정한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결국 이 두 분의 존재는 하나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한 분이심을 강조했습니다.  두 분 모두 창조의 사역을 하셨던 분들이고 두 분이 모든 신성을
공유하고 계신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느나 그 본체가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있다면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만들어낸 우상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우상이 살아있습니까?  능력이 있어서 필요할 때 도움을
줍니까?  무엇보다도 그런 우상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줍니까?  바른 믿음이 있어야, 바르게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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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5) 말씀 묵상 (시편 37편23-24절, Psalms 37:23-24)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If the Lord delights in a man’s way,. he makes his steps firm;
though he stumble, he will not fail, for the Lord upholds him with His hand.
 
사람이 가는 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길인지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는 길이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가 걸어가는 길은 견고하기에 그 사람이 결코 요동하거나 피곤하거나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 길을 걸어가는 자는 결코 좌절하거나 장애에 걸려 넘어지거나 미끄러져서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길이요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굳게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라고 해서 항상 바르고 형통하고 평탄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의인도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것같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같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시고 늘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완전히 넘어질 때면 손을 잡아주십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하신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그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눈동자같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우리의 손을 잡으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이 사실에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확신으로 험난한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바른 길을 걸어야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분께서 영광의 면류관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쁘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그 영광스러운 날을 그리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길로 담대히 걸어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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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4) 말씀 묵상 (마태복음 17장20절, Matthew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뇌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He replied,  ‘Because you have so little faith.  
I tell you the truth, if you have faith as small as a mustard seed,
you can say to this mountain, ‘Move from here to there’ and I will move.  Nothing will be impossible for you.’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다’
주님을 쫓는다는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믿음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만났을 때 대처하는 가장 첫 번째 방법은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지금 그렇게 작게, 아니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기에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 조차도 믿음을 점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걱정 근심부터 합니다.  그리고 불안해 하면서 원망과 불평을 하고 사람을 찾거나 인간적인 방법을 찾습니다.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지요.
 
우리가 생각할 것은 그렇게 작은 믿음만 있어도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큰 역사를 보겠습니까!
그러니까 믿음은 크고 작은 의미라기 보다는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로 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얼마만큼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믿음이 있으냐 없느냐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먄약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있다면, 커다란 믿음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것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믿음이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확실하게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확신입니다.  믿음은 미래지향적이요 긍정적입니다.  믿음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순간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평가히신다면 무엇이라고 하실지 생각해보고 믿음을 끌어올려 눈에 보이는 유혹을 이기고 고난을 능히 뚫고 나가는 자랑스런 주님의 자녀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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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3) 말씀 묵상 (이사야 63장7절, Isaiah 63:7)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I will tell of the kindnesses of the Lord, the deeds for which He is to be praised,
according to all the Lord has done for us..yes, the many good things He has done for the house of Israel,
according to His compassion and many kindnesses.
 
선지자는 공동체를 대표해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합니다.  여기서 ‘말하다’는 말은 회상하다, 기억하다는 의미입니다.
자비는 언약에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꼐서 베푸시는 사랑을, 찬송은 찬양받으실 그분의 업적들을, 은총은 행위 가운데 구체화되는 이스라엘을 향한 그 분의 호의적인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모성애적인 자기희생과 일방적인 베풂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 분의 은총을 간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신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자 그 분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특권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자비하시며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환난 가운데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분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 인생을 아시고 스스로 언약을 세우시고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런 사랑과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이름을 높여드림이 마땅합니다.  또한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 분께 신실하게 간구하는 삶이 되어야 함도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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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2) 말씀 묵상 (요한1서 2장10-11절, 1 John 2:10-11)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끔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Whoever loves his brother lives in the light, and there is nothing in him to make him stumble.
But whoever hates his brother is in the darkness and walks around in the darkness;
he does not know where he is going, because the darkness has blinded him.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계명 중의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어둠 가운데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한다면 형제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만약 빛 가운데 거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다른 누군가를 미워하고, 다른 이가 그러면 안 된다고 권면해도 미워할 짓을 했으니 미워한다고 받아칩니다.
하지만, 빛 가운데 거한다면,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이기에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해서 마땋히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은 죄로 인해 죽을 죄에서 용서를 받았는데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잘못을 자신에게 했다고 해서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받고 안다면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다시 죄를 짓더라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꼐서 가르쳐주신 기도 (주기도문)에도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속한 교회는 물론이고, 집, 학교, 직장, 그 어디에서도 미움은 용납될 수 없는 어둠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3:18)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느나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고까지 선포했습니다. (4:20)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덮어둘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됨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혹시 그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을 받은 자임을 기억하고 형제자매를 용서함으로 빛된 자녀임을 증명하는 믿음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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